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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석학 커리어 디시전스 '인재와 함께 일에 취하다'_권욱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작성일
2024-08-06
조회수
5,117

자동제어 분야 연구개발을 선도하는 '산학(産學) 겸비의 공학자'

제46회 석학 커리어 디시전스 강연 '인재와 함께 일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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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욱현 과학기술유공자가 참여한 제46회 석학 커리어 디시전스가 '인재와 함께 일에 취하다'라는 주제로 지난 7월 18일 오후 4시 한림원 회관 1층 라운지에서 50여 명의 한림원 회원과 가족, 제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유장렬 과학기술유공자지원센터장이 사회를 맡은 가운데 개최된 이날 행사에서 권욱현 유공자는 10가지 커리어 디시전스에 대해 강연했다.

이번 행사의 전체 내용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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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렬 유공자지원센터장의 연사 소개


오늘 연사님은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이신 권욱현 교수이십니다. 권욱현 교수는 자동제어 분야에서 이동구간 제어에 관한 세계적 학술성과를 제시하셨으며, 선도적인 벤처기업 육성과 소프트웨어 '셈툴' 개발 보급으로 산업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인재와 함께 일에 취하다"라는 오늘의 강연 제목에서도 느끼실 수 있듯이, 교수님은 한림원에서도 공학부 운영위원, 회원심사위원장과 부원장의 직책으로 10여 년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셨습니다.

자동제어의 학문적 성과와 기술벤처 육성을 동시에 추구하여 그 가치를 극대화한 산학 겸비의 공학자며, 남다른 리더십으로 실험실의 학문적 역량을 높이고자 연구주제별로 팀장 팀원 체제를 도입하여 자율성과 팀워크를 강조했습니다. 특히 유공자님이 세우시고 이끈 제어계측신기술연구센터는 조직적이고 협동적인 연구를 장기간 안정적으로 가능하게 하였으며, 실험실 연구를 창업으로 연결했습니다.

특히, 대학원생들에게 교수 아니면 창업하라고 하시며 실험실 벤처 창업을 강조했습니다. 실험실 연구에서 창업으로 전환하는 구조가 갖추어져 서로 간에 시너지를 일으키기까지는 리더십과 함께 많은 인재를육성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권욱현 유공자님을 큰 박수로 환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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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욱현 과학기술유공자 '인재와 함께 일에 취하다'

저는 목표 설정이 곧 커리어 디시전스(Career Decisions)라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정주영 회장의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나면 그날 할 일로 가슴이 설렌다"라는 말씀처럼, 저도 목표를 세우는 순간부터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설렘을 느낍니다. "찾으면 찾을 것이오, 구하면 열릴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도 목표를 이루는 비결을 간단히 설명합니다. 고등학교 강연에서 적어준 저의 좌우명인 "꿈을 가지고 오랜 기간 집중하고, 문제의 근본을 파헤치고 성찰하면 창의력이 생기고, 길이 열리며, 해답이 생긴다"를 믿고 살아왔습니다.

저의 커리어 디시전스에 중요했던 것으로 10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겁없이 경기고등학교에 지망하기로 한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동기생들이 아무도 안 가는데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대학원에 지망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셋째는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 가지 않고 Brown대학교로 유학을 가서 5년 만에 귀국하기로 한 것입니다. 넷째는 서울공대에 가서 인재와 함께 연구에 취해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다섯째는 인재와 함께 영문 책을 저술하여 저명학자로 인정받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여섯째는 인재와 함께 실용연구하여 학생 창업에 도움을 주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일곱째는 인재와 함께 과학기술패키지를 개발하여 사회에 남겨보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여덟째는 제어계측신기술연구센터를 설립하여 과학재단 우수센터로 키워보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아홉째는 우리나라 자동화 발전을 위하여 국제자동제어연맹 회장에 도전해 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열째로는 기부할 바에야 젊었을 때부터 하지고 결정한 것입니다.

제가 2023년에 회고록 “인재와 함께 일에 취하다”를 발간하였습니다. 여기에는 84개의 소제목이 있습니다. 오늘 얘기하는 것과 일부 내용이 비슷한 것도 있습니다. 참고될 것입니다. 1988년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제어계측공학과가 전자공학과를 제치고 1등을 차지했습니다. 보통 전자공학과가 서울대 이과 전체에서 1등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IMF 사태 이후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2000년경부터 의과대학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제어계측공학과는 1978년부터 1991년까지 존재했으며, 이후 전자공학과, 전기공학과와 합쳐져 전기정보공학부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런 인재들이 모인 학과와 학부에서 처음부터 근무하였습니다. 오늘 우수한 인재를 초청하였습니다. 우선 전 과기정통부 장관이신 임혜숙 이화여대 교수와 현 부산대학교 총장인 최재원 교수를 소개합니다. 다른 제자는 해당되는 내용에서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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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혜숙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왼쪽)과 최재원 부산대학교 총장]

 

생애 중요한 결정으로, 겁없이 경기고등학교에 지망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저는 안강읍(현재 경주시)에서 태어나 해방 후 포항으로 이사했으며, 6·25사변 때는 폭격으로 집이 전소되었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유학 가고 싶었는데 가난하여 불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마침 시집간 누님이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재워 줄 것으로생각했습니다. 준비 없이 지망해서 처음에는 낙방하여 재수를 결심했습니다. 참고서를 구매해 포항 집에서 독학하였습니다. 다음 시험에는 수학을 잘해서 합격한 것 같습니다. 이런 실패 경험으로 매사에 철저히 준비하는 버릇을 갖게 되었습니다. 많은 우수한 학생들 사이에서 나의 재능이 수학적 능력에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3학년 때 겨우 우등상을 받아 대학 진학이 쉬웠습니다. 대학에서는 가장 이론적인 내용이 많은 것 같은 전기공학과를 선택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경기고등학교에서 3년 우등상을 받은 현재천 교수도 계십니다.

생애 또 다른 중요한 결정으로, 군대 복무를 마친 후, 동기생 아무도 가지 않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대학원에 지망한 것입니다.대학 졸업 후 ROTC로 육군 통신학교에서 군 복무를 마쳤습니다. 이후 진로를 결정할 때 대부분의 동기는 취직했지만, 저는 서울공대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서울공대에서 선배 교수들이 했듯이 유급 조교, 전임 강사, 조교수의 길을 걸으려고 했습니다. 공부하는 재능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이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전기과 졸업 시 1등을 했고, 공과대학 전체에서 2등을 했습니다. 그 당시 성적은 2.72이었지만, 이는 4.3 만점으로 환산하면 약 4.0 정도였습니다. 이 자리에는 전체에서 1등을 한 김유항 교수님도 계십니다. 성적 덕분에 대학원 입학 후 1년 만에 교육공무원인 유급조교로 임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 유급조교들을 앞으로는 전임강사로 임용하지 않겠다는 학교 방침에, 유학을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학원은 유학 준비하는 데 좋은 환경입니다. 교수님들로부터 추천서를 얻기 쉽고, 시간이 많아 영어 공부 등 유학 준비하기가 쉽습니다. 대학원 전공 선택은 그 당시 새로운 분야였던 자동제어를 택하였습니다. 전자회로 실험을 담당하였고, IBM 1620 컴퓨터를 수리했던 경험을 통해 실용기술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서울공대 대학원에서의 과정으로 유학을 가는 등, 저의 앞날의 학문적 발전과 커리어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생애 또 다른 중요한 결정으로,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 가지 않고 Brown대학교로 유학 가서 5년 만에 귀국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유학 준비 과정에서 MIT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습니다, Brown대학교로부터는 연구장학금을 받았습니다. 폴브라이트재단으로부터도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폴브라이트장학금을 받고 MIT로 갈까 고민하였습니다. MIT로 가기에는 폴브라이트 장학금이 부족했습니다. 얼마 전 폐결핵에 걸려 완치되었지만, MIT보다는 Brown대학교가 건강상 덜 부담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5년 만에 박사를 마친 후 서울대학교 교수로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이런 조건 등으로 Brown대학교를 선택하였습니다. 5년 후에 돌아올 바에야 폴브라이트장학금 중 왕복 여비와 하계 오리엔테이션 지원비를 받기로 하였으며, 5년 만에 반드시 돌아오는 조건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5년 내 박사학위를 취득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3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저는 지도교수님의 어려운 연구분야 대신 다른 분야에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약 2년 반 후 교수님의 권유로 지금까지 학회지에 발표한 3편의 논문을 정리하여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박사를 마친 후 일 년간 Brown대학교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습니다. Brown대학교에 있을 때 “이동구간제어(Receding Horizon Control)”를 발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8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2편의 논문이 인용 수가 아주 많습니다. 지도교수님의 추천으로 Brown대학교에서 졸업생에게 주는 최고상인 BEAM(브라운공대동문메달)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Brown대학교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만약 MIT에 갔더라면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생애 또 다른 중요한 결정으로, 서울공대에 가서 인재와 함께 연구에 취해 보기로 한 것입니다. 저의 연구 분야는 제어계측(Control and Instrumentation)입니다. 로봇, 자동차, 항공기 같은 것을 플랜트라 합니다. 플랜트에 적당한 제어이론을 연구하고, 컴퓨터이용제어시스템설계(CACSD) 패키지를 사용하여 프로세서 컴퓨터에서 설계하고, 그 내용을 네트워크를 통하여 제어기에 전달하여 플랜트를 작동시킵니다. 프로세서 컴퓨터, 네트워크, 제어기 등을 구축하는 것을 계측(Instrumenta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와 다섯째 디시전스는 제어이론에 관한 것이고, 여섯째는 계측에 관한 것이고, 일곱째는 CACSD 패키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저는 대학원에 입학한 학생들은 누구나 매우 우수하다고 생각하며, 가능한 지도학생을 많이 선발하려고 했습니다. 설악산, 제주도, 해외 등에서 매년 2박 3일의 겨울워크숍을 개최하였습니다. 이때 영문논문을 제출하게 하여 프로시딩을 만들고, 영어로 발표하게 하였습니다. 논문작성법 책자를 제공하고 영어문법 틀릴 때 벌금을 부과하는 등 엄격하게 지도했습니다. 매주 전체 세미나, 그룹 세미나를 개최하여 발표능력과 정보교환을 활발히 했습니다. 그 결과, 연구실에서 작성된 논문들이 높은 인용횟수를 기록하며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논문 인용수가 많은 문영수 슈프리마 전 대표, 박부견 포항공대 교수, 한수희 포항공대 교수, 이영삼 인하대 교수를 소개합니다. 이러한 인재들이 있기에 제가 오늘날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연구실 출신 중 약 30명이 교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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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욱현 유공자(왼쪽에서 여섯 번째)와 제자들]

 

생애 또 다른 중요한 결정으로, 인재와 함께 영문 책을 저술하여 저명학자로 인정받자고 결정한 것입니다.영문교과서를 작성하는 것은 학문적 이미지와 명성을 쌓는 데 중요하지만,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평가되지 않는 것이 아쉽습니다. 저는 두 권의 영문교과서를 통해 제 연구결과를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이를 통해 학문적 영향력을 넓혔습니다. 두 권의 영문 책, “이동구간제어(Receding Horizon Control)”와 "Stabilizing and Optimizing Control for Time-Delay System: Including Model Predictive Controls"를 집필했습니다. 첫 번째 책은 은퇴 전에 한수희 제자와 두 번째 책은 은퇴 후 10년에 걸쳐 박부견 제자와 함께 저술하였습니다. 특히, 미국 공학아카데미의 지명서에, 제가 Receding Horizon Control의 이론적 토대를 쌓았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Receding Horizon Control이 실시간 최적화를 통해 제어시스템 디자인에 혁신을 가져왔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권의 영문 교과서를 저의 중요한 5개 연구 업적 물 중 2개로 나열하였습니다. 이 영문교과서를 통하여 저명학자로 인정을 받은 셈입니다.

생애 또 다른 중요한 결정으로, 인재와 함께 실용연구하여 학생창업에 도움을 주기로 한 결정입니다. 저는 실용연구로, 특허나 시제품 제작보다는 학생창업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기초연구비가 거의 없었습니다. 반면 1980년대 우리나라 산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국산화 붐이 일어 한국전력, 포스코, 삼성전자 등으로부터 개발 프로젝트를 수탁할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에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의 등장으로, 1980년대에 IBM 개인컴퓨터가 탄생하였고 이 기술을 적극 활용해 디지털 디자인이 가능해졌습니다. 우리 연구실이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R&D를 위해, 제어 및 설계, 산업 네트워크, 디지털 컨트롤러 등 세 팀으로 구성하고 많은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했습니다.

우리 연구실에서 Z-80 인-서킷 에뮬레이터를 제작하였는데, 이것으로 학생들은 마이크로프로세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다양한 디지털 컨트롤러와 통신기기를 제작하며 실질적인 프로젝트 경험을 쌓은 학생들은 졸업 후 대기업 취직 대신 창업에 도전했습니다. 그리하여 휴맥스, 우리기술, 파인디지털, 파이오링크, 슈프리마 등 10여 개 회사가 창업되었습니다.

창업이 가능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여러 디지털 장치들을 만들어 보는 경험을 얻었습니다. 팀 제도를 통하여 협업, 유대감, 리더십을 배웠고,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을 잘 알고 있었고, IT 분야 이어서 개발 품목이 많았으며, 지도교수가 창업정신을 강조하였고, 또한 직접 개입하지 않아서 학생들이 독립적으로 창업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대략 36명의 제자가 창업에 참여했습니다. 제자들의 창업실적으로 제가 외부에서 상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블랙박스 장치를 생산하는 파인디지털을 창업한 김용훈 대표를 소개합니다. 우리기술은 원전의 컨트롤룸 기기를 수출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노선봉 전 대표를 소개합니다. 슈프리마는 지문 인식기분야에서 세계 선도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이재원 회장을 소개합니다. 파이오링크는 보안분야와 네트워크 부하 밸런싱 기술에서 큰 성과를 냈습니다. 조영철 대표를 소개합니다. 변대규 회장을 참석하려고 했으나 급한 일로 참석 못 했습니다. 설계를 아주 잘하며, 서울대 교수, 카이스트 교수, 현재 SDI 부사장인 장래혁 박사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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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선봉 전 대표(왼쪽)와 김용훈 대표]

 

생애 또 다른 중요한 결정으로, 인재와 함께 과학기술패키지를 개발하여 사회에 남겨보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자동화 설계를 위해 MATLAB과 같은 소프트웨어가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이론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연구실은 MATLAB과 같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사회에 기여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중 진자 시스템을 모델링할 때, 코딩 작업을 도와주며 시뮬레이션으로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러한 소프트웨어 개발은 학문적 성과와 사회적 기여를 목표로 했습니다.

1994년에 '셈툴 2.0'을개발하여 계산을 도구화했으며, 여러 단계를 거쳐 2006년에는 CEMTool 6.0을 발표했습니다. 그 기간에 시뮬레이션과 그래픽 기능을 갖춘 'SIMTool(심툴) 4.0'을 개발했습니다. 또한, 다양한 부가 기능인 Autotool, CEMLink, Toolbox 등을 추가하여, MATLAB의 좋은 기능들을 포함하려 했습니다. 셈툴을 보급하기 위해서는 회사가 있어야 하는데, 리얼게인 회사를 설립하고 최성규 제자가 대표를 맡았습니다. 10년 동안 운영하다가 M&A되어, 2009년에 셈웨어 회사를 설립하여 감광진 제자가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제가 이들 회사 설립 때 도움을 드렸습니다. 무료로 보급하고는 있으나 상용화는 하지 않고 있어 이직 성공은 미정입니다. 제가 가장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애 또 다른 중요한 결정으로, 제어계측신기술연구센터를 설립하여 과학재단 우수센터로 키워보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1990년대 기초연구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과학재단의 우수공학연구센터당 연간 10억원 지원 발표는 큰 기회여서 우수 공학센터 설립을 결심했습니다. 서울대학교 교수 15명과 10개 타 대학의 교수 14명을 모아 로봇, 생산자동화, 영상인식, 수치제어, 지능제어 등 5개 분야를 연구하는 센터를 구성했습니다. 전기전자컴퓨터 분야에서 12개 센터가 신청하였는데 저의 센터가 유일하게 선정되었습니다. 이는 저의 진정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제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외국 전문가들을 많이 초대하였으며, 목표지향적으로 센터를 이끌었습니다. 1단계 3년은 산학콘소시엄 활동을 강조하였고, 2단계 3년에는 생산자동화를 강조하였습니다. 1996년에 미국에서 생산자동화 분야에서 “대학선도상(University Lead Award)”을 수상했으며, 이는 미시간대학등과 경쟁하여 얻은 성과였습니다. 턱시도와 나비넥타이를 입고 한 수상 연설 때 이에 대한 농담을 하여 큰 호응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3단계에서는 과학기술계산패키지를 공동 개발하였는데 과학재단 30대 우수과제로 선정되어 상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1단계 A, 2단계 A, 3단계 A를 평가받아 최고의 센터가 되었습니다. 제가 연구실 운영뿐만 아니라, 센터 운영능력도 우수했음을 인정받은 셈입니다.

생애 또 다른 중요한 결정으로, 우리나라 자동화 발전을 위하여 국제자동제어연맹 회장에 도전해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제가 국제자동제어연맹(IFAC)에서도 활동하고 있었으며,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이 단체가 개최하는 세계학술대회(World Congress)를 한국에서 유치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회장에 관심이 없어, 강력한 회장 후보였던 일본 교수에게, 회장은 당신이 맡고 세계학술대회는 한국에서 개최하자고 제안했는데 거절해서, 직접 회장직에 도전했습니다. 일본, 독일, 한국의 경쟁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아시아에서 활동을 많이 하여 아시아 리더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일본에서도 지지가 많았습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외국에서 많은 지지를 얻어 결국 회장이 되었습니다.

목표지향적인 저는 역사상 가장 멋진 세계학술대회를 개최할 목표로, IFAC 부회장, 차기 회장, 회장으로 봉사하던 9년 동안 준비했습니다. 삼성전자, 제자 회사 등의 지원을 받아 2008년에 IFAC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서울시로부터 최우수 학술대회상도 받았습니다. 또한, 아시아인 회장으로서 좋은 인상을 남기고자 기금을 기부하여 IFAC 재단을 설립하여 주었습니다. 회장으로서 두가지 큰 일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는 '권욱현 렉처' 시리즈를 통해 매년 유명 학자들을 초청하고 있으며, 거의 전부가 미국공학아카데미(NAE) 회원일 정도로 저명합니다. 이는 제가 국제자동제어연맹 회장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강연자들 때문에 제가 미국 공학아카데미 회원이 된 면도 있습니다. 이 렉처 시리즈는 오늘 모임에 계시는 서울대 심형보 교수님이 운영하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생애 또 다른 중요한 결정으로, 기부할 바에야 젊었을 때부터 하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저는 목표주의자라서, 기부를 내 인생의 목표의 하나로 삼았습니다.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다 보니 자주 기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상금, 특히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으로 받은 3억원이 있었고, 아내가 대학교원이라 기부를 적극 찬성하였고, 창업한 제자들의 도움이 있었고, 그리고 14년 동안의 LS그룹 사외이사 수입 등이 기부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노년에 기부하려다 기회를 놓칠 수 있음을 깨닫고 1995년, 51세 때부터 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주로 장학금, 상금, 시설기금, 학술활동비 등을 지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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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욱현 유공자 석학 커리어 디시전스 강연 참석자]

 

국내에는, 재직했던 서울대 석좌교수로 있었던 DGIST, 회장을 역임했던 제어로봇시스템학회와 대한전기학회, 부회장 역임했던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 기부했습니다. 오늘 강연하는 이 건물 건축기금으로 민간 개인으로 두 번째 많이 했으며, 어느 방에 제 이름도 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회장을 역임한 국제자동제어연맹(IFAC), 아시아제어협회(ACA), Brown대학교, 세계과학아카데미(TWAS)에 기부하였습니다. 2022년부터는 미국공학아카데미의 아인슈타인 소사이어티 기금에도 기부하였습니다. 나중에 손자에게 저의 이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런 기부 활동을 하다 보니 저의 이름이 들어있는 상이 여러 개 생겼습니다. 국제적으로, IFAC Foundation Kwon(권) Award, ACA Wook Hyun Kwon(권욱현) Education Award가 있고, 국내적으로 대한전기학회, 제어로봇시스템학회, DGIST에 저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상이 있습니다.

강연을 마치며 몇 가지 소감을 얘기하겠습니다. 저는 재능이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한가지 일에 집중했습니다. 기초연구로 학생 논문지도와 영어책 집필, 실용 연구로 제자들의 벤처창업 지원, 그리고 학술단체 봉사활동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보니 후회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제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친척, 선배, 후배들에게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을 반성합니다.예술이나 인문학 등 다른 분야에 부족한 점이 많아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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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욱혁 유공자(왼쪽에서 세 번째)와 가족]

 

제가 잘 된 것이 인재들 때문이라 제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학술 활동을 함께한 선후배 동료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가족들이 잘 자라주었기에 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어 가족에게 감사하며, 특히 집사람에게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대학 현직교수일 때 65세까지 사는 것이 목표이었는데, 지금까지 건강을 주신 하나님에게도 감사합니다.

 

 [석학 커리어 디시전스 강연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