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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세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작성일
2020-04-20
조회수
94,118

한국 수학의 위상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수학자 박세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인 그는 고령인 지금도 온종일 연구를 하며 하루를 보낸다. “철학과 역사를 원하는 만큼 많이 공부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철학과 역사 공부에 관한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정작 수학이 모든 과학의 중심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노교수에게서 수학을 대하는 그의 마음이 녹진하게 묻어났다.

박세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책벌레 소년, 수학을 만나다

“예전부터 읽고 싶은 소설이 있는데 아직 읽지 못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연구만 끝나면 읽어야지 몇 번을 다짐하지만 매번 시간이 모자라네요.” 여든이 넘은 백발의 노교수는 눈을 반달처럼 접고 아이처럼 웃었다. 그 웃음에서 한번 잡은 책은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손에서 떼지 않았다던 까까머리 ‘책벌레’ 소년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됐다.

비록 다방면에 분산되었던 관심을 ‘수학’으로 수렴했지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진학 뒤에도 그는 문학, 철학, 역사 등 인문계 과목을 활발히 수강했다. 어렴풋이 수학교사를 염두에 두고 있던 그의 미래는 대학 은사인 최윤식 교수의 권유로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방향을 선회했다. 이후 약 60년에 걸쳐 서울대학교 수학과 한 곳에 헌신했다. 다양한 논문, 29편의 저서와 역서 등 총 842편이라는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 또한 국제학술회의 연구 발표 160여 회, 국내회의와 대학 초청강연 100여 회 등을 통해 국내 수학계의 활성화는 물론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공헌했다.

 

수학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만든 수많은 업적

박세희 교수의 수학적 업적은 ‘비선형해석학에서 해석적 부동점 정리들을 통일’한 것과 ‘추상볼록공간의 이론을 정립’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해석학에 나오는 여러 가지 부동점이론의 정리들을 통일한 이론으로, 박 명예교수는 1994년 대한민국학술원상을 받았다. 폴란드 학자들이 만든 추상볼록공간 정리에서 파생된 백여 개의 정리와 그것과 관련된 일반적인 연구를 하나로 요약한 ‘추상볼록공간 이론 정립’은 첫 번째 업적의 연장 선상에 있다.

그는 이 안에서 새로운 방대한 논리체계인 ‘Grand KKM Theory’를 확립함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390여 회나 논문에 인용되는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교육자로서도 박 교수는 큰 족적을 남겼다. 오랜 기간 서울대학교 수학과에 재직하면서 30여 년간 세미나를 주재하며 15명의 석사와 12명의 박사를 양성했다. 교과과정과 교재를 현대화하고 대학원 과정의 교육과 연구를 정상 궤도에 올리는 데에도 중심적 역할을 했다.

이밖에도 각종 교과서 편찬 및 수학과 수학사, 수학 철학 등을 알기 쉽게 소개하는 대중서 저술 및 번역에 헌신하는 등 수학의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뿌리가 튼튼해야 나무가 잘 자라듯, 수학은 학문의 기초

말을 마친 박 교수는 서재에서 ‘수학의 철학’이라는 책을 꺼내 왔다. 책을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이나 애틋했다. 그가 오래전, 하루에 한 페이지씩 무려 3년에 걸쳐 번역했다던 1,000페이지짜리 장서였다.

“읽은 사람이 있을까요?” 그가 물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라도 읽었다면 나는 그 한 사람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한 거예요. 그러면 됐지요,” 했다. 그 명료한 한 마디에서 오랜 구도의 과정을 거치며 터득한 수학자의 철학이, 지나온 세월의 농도가 느껴졌다. 모두가 응용 학문을 연구할 때, 그는 고집스럽게 기초 학문인 ‘수학’에 집중했다. 뿌리가 튼튼해야 나무가 잘 자란다는 믿음에서였다. 그 견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변방에 머물러 있던 대한민국을 끝내 수학 강국으로 길러냈다.

수학의 해석학에서 부동점이론을 발전시키고 수학사·수학, 철학 분야 연구와 집필을 통해 한국 수학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박 교수는 2019년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되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속에서 한 줌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연구와 교육을 위해 투자한 시간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그 자신의 말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끝으로, 그는 “저 같은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싶지만, 불러만 준다면, 아직 할 수 있는 있다면 얼마든지 도움이 되고 싶어요. 이제 와 지금껏 하지 않은 획기적인 시도를 하긴 어렵겠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일이라면 충실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강의든, 아니면 저술 활동이든 말입니다. 어차피 영웅이 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주어진 환경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라며 과학기술유공자로서의 바람을 전했다.

≪박세희 유공자 인터뷰 영상 바로가기:https://youtu.be/q7vV5EEig4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