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스토리 뉴스

스토리 뉴스

한국 국방연구개발의 기틀을 닦은 연구관리자

번개사업의 성공적 완수로 기본 병기 국산화 달성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백곰 개발 사업 주도
국내 최초의 품질보증제도 구축으로 공업기술의 표준화 및 규격화 기여

#1.(표지) 한국 국방연구개발의 기틀을 닦은 연구관리자 故심문택 번개사업의 성공적 완수로 기본 병기 국산화 달성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백곰 개발 사업 주도 국내 최초의 품질보증제도 구축으로 공업기술의 표준화 및 규격화 기여 #2. 학력 1944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졸업 1948 서울대학교 화학과 졸업 1956 미국 인디애나대학 이학박사(화학) 경력 1949~1963 연세대학교 화학과 교수 1963~1964 원자력연구소 연구관, 화학실장 1964~1966 서강대학교 화학과 교수 1966~1972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 부소장, 소장서리 1972~1980 국방과학연구소 소장 1981~1989 경희대학교 화학과 교수 포상 1972 국민훈장 동백장 1979 보국훈장 통일장 #3.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임전무퇴로 국방기술을 완성한다.” 남해 한산도 충무공 사당 앞에 네 사람이 섰다. 바로 심문택, 김재관, 이경서, 김훈철 등 네 명의 박사였다. 장차 국방과학연구소(ADD)의 소장과 부소장이 될 그들은 이순신 장군 영정에 절을 하며 자주국방을 위해 모든 재능과 열정을 쏟아붓겠다고 다짐했다. 도원결의에 버금가는 한산도결의가 막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심 소장을 필두로 한 그들의 활약은 오늘날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기틀이 됐다. 그중에서도 심 소장은 확신의 리더십으로 한국 방위산업의 학문적 토대와 실무적 연구개발시스템을 완성시킨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4. 심문택 소장은 1923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1944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를 졸업한 그는 해방 이후 서울대 화학과에 입학해 1948년 졸업했다. 그 뒤로 연세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재직했는데, 학문에 대한 목마름으로 1953년 유학길에 올라 미국 인디아나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1956년 물질확산에 관한 이론적 논의를 담은 “Diffusional Processes in Nickel Oxide, Cuprous Oxide and Silver Sulfide” 논문으로 화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5. 귀국한 뒤 그는 교육과 연구 활동을 병행했다. 유학 전 몸담았던 연세대 화학과에서 이론화학과 물리화학을 가르치며 물질의 부식에 대해 연구한 그는 1963년 원자력연구소 연구관으로 자리를 옮겨 화학연구실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듬해에는 새로 설립된 서강대학교 화학과 교수이자 학과장으로 신설 학과의 자립을 도왔다. #6. 1966년 세워진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창설멤버로 들어간 그는 1968년 제1연구담당 부소장이 되어 한국 중화학공업 발전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1971년에는 KIST 초대 소장이었던 최형섭 박사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소장대리가 됐다. 당시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과학자이자 미래가 보장된 과학계의 지도자로 신망을 받고 있었다. 과학자들의 존경을 받으며 소장 대행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 그는 다음 해 ADD의 제2대 소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7. 그가 부임할 당시 ADD는 번개사업을 숨 가쁘게 진행하고 있었다. 번개사업은 1971년 11월 대통령의 긴급 특명으로 시작됐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어야 할’ 정도로 주어진 시간이 촉박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번개사업’은 기본 설계 도면조차 없던 여건에서 반년 만에 소총, 수류탄 및 각종 탄약, 그리고 개인 장구류 등을 개발하여 기본 병기 및 장비 국산화를 이뤄내야 하는 사업이었다. #8. 두 달여밖에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 불가능해 보이는 사업이었지만, 연구실에 야전침대를 들여놓고 생활하며 불철주야 연구에만 매달린 과학자들 덕분에 시제품을 개발하는 1단계 사업은 대성공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1차 사업 성공에 힘입어 정부는 야전에서 직접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ADD는 2차 사업의 추진을 서둘렀다. #9. 건강상 사임한 신응균 초대 소장의 뒤를 이어 자리에 앉게 된 심 소장의 어깨는 무거웠다. 그러나 이미 사업은 진행 중이었고, 반드시 성공으로 이끌어야 했다. 다행히도 그에겐 든든한 지원군들이 있었다. 어수선한 와중에도 사업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아내고 있었던 연구원들의 열성적인 노력 덕분에 제2차 번개 사업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3차까지 진행된 번개사업은 무기 국산화에 대한 국가적 자신감을 키우는 발판이 됐다. #10. 번개사업 이후 그는 민간 연구원 중심 체제로의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KIST보다 역량있는 연구소로 키우기 위해선 조직의 체제 변화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는 국내외 능력있는 과학자들을 지속적으로 확보함으로써 연구소의 역량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11. 그가 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ADD는 153명의 해외 박사학위자를 포함한 최고의 인력들을 불러들이는가 하면, 당시 파격적인 제도로 과학기술특례보충역제도를 도입하는 등 641명의 우수인력을 확보하며 국방 과학기술 역량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인재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그의 신념이 성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12. 그는 1972년부터 ‘항공공업육성계획’이라는 위장 명칭으로 한국 최초의 지대지 유도탄 개발 사업 단장을 맡아 연구개발을 이끌었다. 목표는 1975년까지 사거리 200km의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기술도, 인력도 전무한 상황에서도 심 소장은 즉시 위장 명칭에 따라 항공공업개발계획단을 꾸리고, 최고의 인력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KIST에서 유체기계연구실장을 맡고 있었던 이경서 박사를 필두로 십여 명의 최정예 인력들이 ‘4개월 이상 집에 돌아갈 수 없으니 합숙 준비를 철저히 해서 ADD로 모이라’는 그의 지시를 받고 모였다.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백곰’ 개발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13. 미사일과 관련된 자료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맨땅에 헤딩을 하던 와중 미국 육군 미사일연구소(MICOM)로의 파견과 노스톱 항공사에서의 기술연수는 천금과도 같은 기회가 됐다. 이때 연구진들이 입수한 자료는 우리나라 미사일 개발 계획의 수립과 실행에 귀중한 자산으로 활용됐다. 이렇게 기술 개발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마친 그는 이후 미사일 핵심기술을 도입·개발해 1978년 9월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백곰’의 시험 발사를 성공시켰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7번째로 지대지 유도탄 개발국이 됐고, 이때 개발된 기술들은 대한민국 첨단 미사일 개발의 원천이 됐다. #14. 당시 백곰 미사일 시험발사 행사에 참석해 성공을 눈앞에서 목도한 박정희 대통령이 일기에 쓴 내용이다. “금일 오후 서산군 안흥에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미사일 시험발사가 있었다. 1974년 5월에 미사일 개발에 관한 방침이 수립된 지 불과 4년 동안에 로켓, 미사일 등 무기 개발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여 금일 역사적인 시험발사가 있었던 것이다. 대전차 로켓, 다연장 로켓, 중거리 로켓, 장거리 미사일의 네 종목이 다 성공적이었다. 그동안 우리 과학자들과 기술진들의 노고를 높이 치하한다.”(홍재학, ‘국방과학연구소와 박정희 대통령’ 중) #15. ADD의 이러한 노력들은 열악했던 국내 산업기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가 됐다. 국내에 없는 기술들을 직접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장비 도입에도 앞장섰던 ADD의 기술개발 노하우가 산업 전반에 전파되기 시작했고, 이는 우리나라 공업 기술의 선진화를 이끄는 촉매가 됐다. 더불어 그는 국내 최초로 품질보증제도를 구축해 방산장비 및 물자에 대한 신뢰도를 높였으며, 이는 국방 및 방위산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국내 공업기술의 표준화 및 규격화, 기술 향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16. 심문택 소장은 1972년 2월부터 1980년 8월까지 ADD의 제2, 3, 4대 소장으로 재직하며 국방 연구개발의 성장 기반을 마련해 한국 국방과학기술 분야 개척을 선도했다. 연구개발 우수 인재 양성은 물론, 연구 관리체계 구축 및 품질보증제도 확립, 연구개발 인프라 확충 등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대한민국의 자주국방을 염원하며 조금의 쉼도 없이 국방 기술 개발에 평생을 헌신한 그의 희생적 삶 덕분에 현재의 안전한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