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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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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 신호전달 연구의 세계적 선구자

포스포라이페이스 C(PLC) 아이소자임 발견 등 세포 신호전달 연구의 기틀을 마련
퍼옥시레독신(Prx) 항산화효소 발견 등 산화환원 생물학 분야를 개척
이화여대, 연세대, 기초과학연구원 등 한국 생명과학 기반 강화에 기여

#1.(표지) 세포 신호전달 연구의 세계적 선구자 이서구 포스포라이페이스 C(PLC) 아이소자임 발견 등 세포 신호전달 연구의 기틀을 마련 퍼옥시레독신(Prx) 항산화효소 발견 등 산화환원 생물학 분야를 개척 이화여대, 연세대, 기초과학연구원 등 한국 생명과학 기반 강화에 기여 #2. 학력 1965 서울대학교 화학과 졸업 1972 미국가톨릭대학 이학박사 (유기화학) 경력 1973~2005 미국국립보건원(NIH) 국립심장·폐·혈액연구소(NHLBI) 생화학실험실 박사후연구원(73~75), 직원연구원(75~79), 선임생화학자(79~94), 신호전달부문 책임자(88~94),세포신호전달실험실장(94~05) 2005~2013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약학부 석좌교수/분자생명과학기술원 원장 2013~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생명과학부 석좌교수/연세의료원 연세의생명연구원 원장(13~15)/의생명과학부 객원교수(17~현재) 2015~2017 기초과학연구원(IBS) 이사장 포상 1991 미국 국립보건원(NIH) 원장상(Director’s Award) 1995 호암과학상 2005 프리라디칼생물의학회(SFRBM) 디스커버리상(Discovery Award) 2006 대한민국 제1호 국가과학자 선정 2013 미래창조과학부 지식대상 2014 캘리포니아 옥시젠 클럽 및 자로우 포뮬러스 건강과학상 2021 국제활성산소학회 “산화환원 선구자”(Redox Pioneer) 지정 #3. “한번도 명함을 판 적이 없습니다. 불편한 적이 없어요. 연구하는 사람의 명함은 논문 아닌가요.”(한인과학기술자네트워크 인터뷰 중, 2004.10.17.) 연구하는 사람은 연구로 자신의 진가를 증명해야 한다. 이서구 박사는 외부에 이름을 알리거나 지위를 높이는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연구 활동에만 열중한 뼛속까지 과학자였다. 세포 신호전달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오늘날 우리나라 생명과학 연구 인프라 구축과 후학 양성에 크게 기여한 그는 명실상부 한국의 대표 과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4. 이서구 박사는 1943년 서울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혼란스러운 학교 생활을 보내야 했음에도, 학업에 열중하며 경기중과 경기고를 졸업하고, 1961년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백광약품에서 장학금을 받았는데, 방학 기간 동안 백광약품이 운영하던 기업 실험실에서 진행되던 연구에 참여해 보기도 했다. 1965년 서울대를 졸업한 그는 학군사관 장교로 임관해 2년 임기를 강원도 양구 2사단에서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5. 1967년 미국가톨릭대학교(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로 유학을 간 그는 화학자 존 아이쉬(John J. Eisch)의 지도 하에 유기금속 물질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고, 1972년 유기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화학을 전공한 그가 생화학 분야에 관심을 두게 된 건 아이쉬 교수의 조언 때문이었다. 천연 물질을 합성하는 연구를 하고 싶었던 그에게 아이쉬 교수는 “지금의 화학 지식으로는 천연 물질을 합성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니, 생명체 내에서 천연 물질을 만드는 데 관여하는 촉매인 효소를 연구해보라”고 조언했다. #6. 그는 미국국립보건원(이하 NIH)의 리처드 티몬스(Richard Timmons) 교수가 추천한 NIH의 얼 스테트만(Earl R. Stadtman) 박사의 생화학 실험실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새로운 분야인 효소학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스테트만 박사는 노벨상 수상자 2명을 비롯해 수많은 미국 학술원 회원을 배출한 공로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과학 메달(National Medal of Science)을 수상한 저명한 과학자였다. 1973년에 NIH 박사후연구원으로 처음으로 경력을 시작한 이서구 박사는 뛰어난 연구 성과 덕분에 입사 후 불과 6년 만인 1979년에 NIH 종신연구원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게 된다. #7. 스테트만 박사는 노벨상 수상자 2명을 비롯해 수많은 미국 학술원 회원을 배출한 공로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과학 메달(National Medal of Science)을 수상한 저명한 과학자였다. 1973년에 NIH 박사후연구원으로 처음으로 경력을 시작한 이서구 박사는 뛰어난 연구 성과 덕분에 입사 후 불과 6년 만인 1979년에 NIH 종신연구원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게 된다. #8. 이서구 박사는 이러한 세간의 평가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연구에만 전념할 뿐이었다. 스테트만 박사는 그에게 종신연구원이 됐으니 새로운 연구과제를 개발해 도전해보라고 조언했다. 이서구 박사는 스테트만의 지지를 밑거름삼아 1986년부터 포스포라이페이스 C(Phospholipase C, 이하 PLC)라는 인지질분해효소의 세포신호전달 기능 연구에 돌입했다.PLC는 이후 그의 연구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인 주제가 될 것이었다. PLC는 뇌세포 신호전달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효소로 생체 신호전달의 핵심으로 통한다. 이 박사는 1986년에 세포 내 신호전달 체계의 기본 물질인 PLC를 발견하고 그 역할을 알아내 국제 생명과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9. 그가 밝혀낸 PLC의 기능은 세포에 외부 충격이나 침입이 일어났을 때 발현해 세포가 외부 자극을 감지하고 적절하게 반응하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바이러스가 체내에 침입했을 때 세포가 이를 인지하게 돕는다는 것으로, 이 같은 그의 발견은 질병의 발현 현상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0. 한편, PLC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구 주제 중 하나가 바로 활성산소이다. 그는 1988년 활성산소를 없애는 항산화 단백질인 퍼옥시레독신(이하 Prx)을 세계 최초로 발견하고 Prx의 새로운 기능을 규명함으로써 독성물질로만 간주되던 활성산소의 새로운 역할을 밝혀냈다. 활성산소는 호기성 생물의 산소 대사 과정의 부산물로 생성되는데, 불안정하고 반응력이 커 세포막이나 DNA를 공격하거나 단백질의 구조를 변형시켜 노화를 촉진시킬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알려져 왔다. #11. 그러나 이 박사는 활성산소를 다른 측면에서 바라봤다. 그는 호암상 수상 소감에서 “활성산소는 세포의 성장과 분화에 필요한 신호전달 물질이기 때문에 세포가 일부러 만들어야 하는 필요악”이라며 “무차별한 항산화제의 사용으로 활성산소를 항상 억제하는 것이 우리 몸에 꼭 유익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연구성과로 입증했다. 활성산소가 세포 생존에 필수적인 신호를 작동시키는 등 생명 유지에 필요한 순기능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규명한 것이다. 그의 연구는 암, 심혈관계 질환, 퇴행성 뇌질환 등 다양한 질병 연구 분야에서 질환의 원인을 규명하고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커다란 방향 전환을 가져왔다. #12. 이같은 사실은 그의 논문이 얼마나 많이 인용됐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가 출판한 총 324편의 SCI급 논문의 피인용 횟수가 2024년 6월 기준 50,985회에 달한다는 점은 그의 연구의 파급효과를 보여주는 객관적인 지표이다. 이렇듯 PLC 연구로 NIH에서 최우수연구자상을 받은 그는 이후 미국 과학정보연구소(ISI)가 선정한 과학기술 분야 최다 피인용 논문 저자로도 뽑히며 세포 신호전달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로 우뚝 서게 된다. #13. 이서구 박사는 후학 양성과 연구 인프라 구축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NIH에서 활동하면서 수많은 한국인 박사들을 박사후연구원으로 받아들였는데, 그의 연구실에서 연구했던 제자들은 국내 생명과학 연구 및 산업 발전의 기반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아 왔다. 2005년, 그는 33년 동안의 NIH 생활을 뒤로하고 귀국해 과거부터 인연을 맺어 온 이화여자대학교의 생명약학부 석좌교수로 부임했다. NIH 연구책임자 시절 이화여대와 공동연구를 통해 이화여대 내 세포신호전달 연구센터 설립을 주도했던 그는 해당 기관이 과학기술부 선도연구센터(SRC) 사업에 선정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밖에도 NIH와 세포신호전달센터 사이의 MOU 체결을 진행해 한국인 대학원생과 연구원들이 NIH에서 연구 경험을 쌓을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14. 2013년에 이서구 박사는 연세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연세의생명연구원의 초대 원장으로 부임한 그는 연구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의학 연구의 발전의 기틀이 될 체제를 구축하는 데 힘썼다. 그는 특히 임상 연구자들과 기초의학 연구자들 사이의 협력을 증진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의 노력 덕분에 현재의 개선된 연구원 문화가 정립될 수 있었다. #15. 이 박사는 연구자는 연구로 대화해야 한다는 신념을 꾸준히 지켰나갔다. 이러한 뚝심 때문에 그의 대외 활동은 흔치 않았다. 몇 안 되는 대외 활동 중 그가 가장 좋아했던 일은 학회 편집인 활동이었는데, 그는 미국 생화학회지 편집위원회에 다년간 봉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2007년부터 4년간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지 Molecules and Cells의 편집인(Editor-in-Chief)을 역임하며 국내 학술지 발전에 공헌하기도 했다. #16. “바람이 있다면, 미국이나 한국 어디에 있든지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다.” 한평생 세포 신호전달 연구에만 몰두하며 관련 학문 분야들을 체계적으로 수립하는 데 크게 공헌하고, 한국의 생명과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 한국 대표 생명과학자 이서구. 그의 ‘한우물 파기식’ 연구는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과학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