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로운 과학기술인 알리기①-조선전기 전통과학의 체계적 종합과 한국적 응용]
세계과학사의 암흑기에 조선 초 과학기술이 빛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
최무선, 이천, 장영실, 세종대왕, 이순지 등 뛰어난 과학기술인 활약
일부 서양과학사 학자들은 세계과학사에서 중세시대를 ‘암흑기’라고 한다. 로마가 몰락 후 수백 년 동안 유럽은 글을 읽고 시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문명이 후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이슬람과 중국을 필두로 아시아는 유럽보다 높은 농업 생산성으로 많은 인구를 부양하며 수공업과 상업이 발전한 대도시를 출현시켰고, 종이, 인쇄술, 나침반, 화약과 같은 발명품을 개발했다. 각자의 지역 환경에 맞게 개발된 아시아의 뛰어난 과학기술과 발명품은 비단길과 뱃길을 통해 자연스럽게 유럽에 유입되었고 16세기부터 시작된 근대 과학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 시기 우리나라에서 역시 세계과학사가 주목할 만한 과학기술의 성과가 나타났다. 특히 15세기 세종시대의 과학기술은 이슬람과 중국에 버금가는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했다. 천문, 역산, 의학, 농업, 지리학, 도량형, 음악, 인쇄, 화약 기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두드러진 발자취를 남겼다. 고려 말기부터 이슬람과 중국의 문화를 흡수하며 쌓아 두었던 문화적 역량이 조선이란 새로운 나라를 세우며 표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뛰어난 과학기술 업적으로 역사를 만들어간 명예로운 과학기술인들을 통해 조선전기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발전사를 되짚어본다.
우리나라 화약의 아버지 ‘최무선’,
화포 개발로 30년 왜란을 하루 만에 평정하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나침반, 화약, 인쇄술의 세 가지 발명이 세상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이 중 화약은 중국에서 적어도 10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나 그 제조법은 어느 나라에서나 최고 기밀이었다. 전쟁의 무기로써 파급력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학기술 교류가 활발한 시대에도 로켓 발사체 기술은 절대 유출되지 못하도록 보호하듯 당시 최첨단기술이었던 화약 제조법도 그러했다.
고려 말,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중국의 원나라와 깊은 친선 관계를 맺고 있었고, 중국과의 학문 교류도 활발했다. 때문에 화약도 몇 차례 얻어다 화기 제작과 불꽃놀이 등에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 제조기술은 전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화약은 황, 염초(질산칼륨), 숯가루를 섞어 만들었는데 특히 염초를 만드는 기술과 3가지 원료의 조합비율이 중요한 지식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염초 제조방법이 기술된 책은 조선시대에나 등장하므로 고려 때는 화약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려 말 장군 최무선(1325~1395)은 이렇듯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개발했다. <고려사>에는 최무선이 중국의 염초 기술자 이원에게서 배웠다고 기술돼 있으나 우리나라 환경에서의 염초 정제 방법과 화약 구성분의 혼합비율은 오랜 시간 스스로 연구해 낸 것으로 보인다.
화약의 국산화에 성공한 최무선은 이를 이용한 각종 무기의 개발과 보급에도 앞장선다. <고려사>에 따르면 1377년(고려 우왕3) 10월 최무선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약무기를 전문 생산하고 관리하는 국가기관인 화통도감이 설치됐고, 이로부터 3년 뒤인 1380년 8월 화포를 사용해 나세, 심덕부, 최무선 등 3명의 해도(海道) 원수가 진포(지금의 군산)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사로잡혔던 334명을 구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학자이자 최무선과 동시대를 살아간 권근(1352~1409)은 최무선의 업적을 칭송하며 <진포에서 왜군의 배를 격파한 최무선 원수를 축하하며>라는 시를 남겼는데 ‘님의 재략이 때맞춰 태어나니 삼십 년 왜란이 하루 만에 평정되도다’라는 극찬이 담겨있다.
최무선의 화약 개발은 이후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에서도 큰 영향을 미친다. 국내 대표적인 과학사 학자인 박성래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저서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에서 고려 말 최무선의 화약 발명이 없었더라면 이성계는 전쟁 영웅으로 새 왕조 창건에서 주도적 지위로 추대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왜구가 갖지 못한 화약 덕분에 이성계는 최무선의 도움을 받아 무공을 세워 뒤에 정치적 야심을 달성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박 교수는 나아가 최무선의 화약 발명과 화약무기 개발은 이후 조선 왕조의 중요한 국방 기술의 전통으로 남아 임진왜란 때 그 위력을 발휘했다고 강조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우리에겐 없었던 소형 화약무기인 조총을 대량으로 가지고 침략해 조선군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지만, 화포 기술에서는 우리가 일본보다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해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는 의견이다.
고려 말 기술천시의 풍조 때문인지 최무선에 대한 업적의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그가 이루어낸 ‘화약의 국산화’가 역사에 공헌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는 현대적 의미의 ‘명예로운 과학기술인’으로 추대되기에 충분하다.
조선 최고과학자 ‘이천’, 대표공학자 ‘장영실’의 협업…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 결실
조선 왕조가 세워진 후 30여년은 끊임없는 숙청으로 얼룩진 피의 역사로서 제도적, 문화적 유산을 남기기엔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태종 이방원이 만들어놓은 안정된 정치적 배경 속에서 32년의 긴 재위기간 동안 새 왕조의 제도적 장치와 문화적 틀을 만들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학문과 연구를 가까이 하는 어진 임금 곁에 슬기로운 신하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 중에서도 조선 시대 최고의 과학자로 손꼽히는 이천(1376~1451)과 대표적인 공학자인 장영실(1390~1450)의 협업은 세종 시대 과학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반가의 맏아들이었던 이천은 1402년(조선 태종2) 무과에 급제하여 18년간 군의 요직을 역임하다 충청도병마도절제사(충청도의 군 총사령관)로 일하던 중 1420년(조선 세종2) 세종대왕의 부름에 따라 공조참판(과학기술 행정관서의 차관)에 임명된다. 그는 1419년 대마도정벌에서 공을 세울 정도로 탁월한 무관이었으나 평안도에서 야인을 정벌하며 대형 화포인 조립식 총통완구를 독창적으로 개발할 정도로 과학기술 지식도 뛰어났다. 특히 <세종실록>에는 임금이 세자에게 혼천의에 대해 이천과 논하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기계 장치의 제도와 원리에 능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영실은 출생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원나라 기술자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영실은 관노로 일하면서 태종 때부터 재주와 총명함을 인정받았고 1425년(세종7)에 상의원별좌에 파격적으로 등용되면서 궁정 과학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장영실은 중국의 각종 천문 기계들을 익혀 빨리 모방하여 만드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이에 면천(免賤)이 이루어졌다 하니 지금으로 따지면 장영실은 역공학(Reverse Engineering)의 대가로도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출신과 나이가 다르지만 세종대왕 시대 주요 분야에서 함께 투입되어 성과를 냈으므로 일정 부분의 업적은 누구의 것이라 특정 짓기 어렵다. 말 그대로 환상의 복식조였던 셈.
먼저 두 사람의 성과 중의 하나는 조선식 청동활자 인쇄술을 완성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1403년의 계미자, 1420년의 경자자, 1434년의 갑인자, 1436년의 병진자, 1450년의 경오자 등 금속활자가 끊임없이 개량되어 갔는데 그 중 특히 진양대군의 글씨를 자본으로 한 갑인자는 15세기 최고의 인쇄본이자 가장 아름다운 금속활자로도 꼽힌다. 이는 이천의 총감독과 장영실 등 6명의 기술 지도로 주조되었는데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섞어 쓰며 하루에 40여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Daniel Boorstin)이 그의 책 <발견자들>에서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인쇄국’으로 규정하는 등 한국의 금속활자 발명과 우수성을 세계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또 두 사람은 천문 관측 기기를 만드는 책임을 함께 맡았다. 농업국가에 있어 천문과 기상의 관측은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중요한 과제다. 때문에 1432년(세종14) 경복궁과 서운관에 설치할 많은 천문 관측 기기를 만드는 계획이 대규모로 착수되었는데, 정인지와 정초가 고전을 조사하여 이론적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장영실과 이천이 직접 연구하여 기계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일을 맡았다.
이에 대한 기록으로 <증보문헌비고>에 ‘중추원사 이천과 호군 장영실이 먼저 목간의를 만들어 한양의 북극출지 38도1/4을 측정하였는데 원사(元史)의 측정치와 거의 맞아 7년 후인 무오년(1438, 세종20)에 대간의, 소간의, 혼의, 혼상,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양부일구, 일성정시의, 자격루를 만들어냈다’고 적혀있다.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이는 15세기 최고 기술이자 최대 규모의 천문 관측 시설에 해당한다.
이밖에 이천은 1422년(세종4) 표준 도량형 제작, 1424년(세종6) 악기 제작 등의 업적을 쌓았고, 장영실은 1434년(세종16)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 1441년(세종23)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는 측우기 개발 등의 성과를 냈다.
조선시대의 우수한 과학유산 중에서도 가장 최고로 꼽히는 것이 인쇄술과 천문기기이다. 특히 해당 분야는 국가 기밀에 속해 있어 중국으로부터 기술적 문제를 배워올 수가 없었다. 피상적이고 단편적으로 설명된 기계 장치들을 실제로 정밀하게 제작하고 가장 초보적인 관측부터 직접 실험해서 순수 조선의 과학 기술 자체에 의존해서 만들어야 했다. 여기에서 이천과 장영실의 과학기술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헤아릴 수 있다.
위대한 천문학자 ‘이순지’…15세기 일식과 월식 예보 가능한 나라는 조선, 중국, 아랍뿐
유교문화에서 하늘의 일은 왕조의 운명을 좌우하는 정치적 상징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에 천문역법은 제왕의 학문이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법은 달력보다 훨씬 복잡한 천체력이었는데 태양 뿐 아니라 달, 오행성의 운행까지 정확히 관찰하고 분석해 일식이나 월식 등을 예측할 수 있는 천문표의 역할도 한다.
원나라 때 사용한 수시력의 경우 1태양년의 일수가 365.2425일로 오늘날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시간을 측정한 것과 거의 일치할 만큼 정확했다. 중세 유럽에서 사용했던 율리우스력은 1582년 그레고리력으로 바뀌기 전에 매년 약 12일의 오차가 났던 것과 비교하면 굉장히 뛰어난 수준이다.
정확한 달력을 제작해 백성에게 알리는 것은 제왕의 의무이자 통치자의 능력을 보여주는 일이므로 역법 제작은 과학기술력이 총동원된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천문학, 수학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와 새롭게 발명된 각종 천문기구가 투입됐다.
세종대왕 역시 즉위 후 정인지에게 한양에 맞는 북극 고도를 찾으라고 명함으로써 가장 먼저 천문역법을 손보기 시작했다. 중국과 한반도는 경위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중국의 역법에서 일식을 예측했던 날짜가 조선에서는 맞지 않았고,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당시 조선은 원에서 들여온 수시력을 운용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천문관은 수시력에 쓰인 수학적 방법론을 이해하지 못했고, 조선 초 명나라의 새로운 역법인 대통력 또한 들여온 보람이 없었다.
세종대왕이 조선의 경위도에 맞는 새로운 역법을 창안하려는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양성한 전문가가 바로 이순지(1406~1465)다. 그는 1427년(세종9) 문과에 급제, 주로 외교문서를 다루는 승문원에 발령 받았으나 1433년(세종15) 세종대왕으로부터 산학을 연구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당시 <세종실록>에 수 년 간 역법 교정의 일을 진행해도 요점을 얻지 못하였다거나 20년 동안 연구한 공이 중도에 없어질까 걱정하는 내용이 나온다. 산학은 중인 계급의 학문이었고 발달되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이때 등용된 이가 이순지이며 그는 다재다능한 과학자의 재능으로 화답, 세종대왕의 이순지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고 한다.
역법의 개발은 20년 만에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가 바로 <칠정산>이다. 태양,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일곱 개 천체의 운행을 계산하는 방법으로 내편은 중국의 가장 정확한 역법이었던 수시력을 바탕으로 한양에서 관측된 자료를 맞추어 새로 작성됐다. 외편은 이순지와 김담이 이슬람 역법인 회회력을 직접 한역본으로 정리한 것이다. 회회력은 고대 그리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토대로 만든 역법으로 당시 세계적 수준의 중국 역법을 뛰어넘기 위해 섭렵한 것이다.
이후 이순지는 천문학서와 역법서를 망라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제가역상집>, 별자리에 대한 해설과 천문이론을 담은 <천문유초> 등의 천문학적 업적을 남기며 누구도 따를 수 없는 15세기 최고의 천문학자로 거듭났다.
과학기술 혁신리더 ‘세종대왕’…명실공히 조선 최고의 과학자
세종대왕(1397~1450)은 천문학, 지리학, 인쇄기술, 군사기술, 의약학, 농업기술 등 거의 모든 과학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이는 창업기의 정치적 변동기를 지나 수성기로서 신생 국가 조선의 제반 제도와 법률, 그리고 정치와 문화의 안정적 틀을 정비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가 과학기술의 분야에서 이루어졌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특히 천문역법에서 보다시피 세종대왕은 조선이 뛰어넘어야 할 산인 중국을 공략하고 그 다음에 조선의 독자성을 추구하는 뚜렷한 전략을 갖고 있었다. 세종대왕은 중국의 최신 지식을 검토하고 조선에 맞는 과학기술을 추구했다.
고려시대에는 원나라의 농법서인 <농사집요>를 쓰고 있었는데 세종대왕은 정초에게 조선의 풍토에 맞고 백성이 직접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농법서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정초는 전국 방방곡곡을 발로 뛰어다니며 늙은 농부의 경험과 기술을 수집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농사직설>을 썼다.
세종대왕은 향약의 국산화를 위해 중국산 약재와 조선의 약재를 비교, 약용 식물의 재배와 수확을 월별로 설명한 <한약채취월령>을 발행했고, 중국 의학서적을 총망라해 동아시아 의학자들 사이에서 역작으로 손꼽히는 <의방유취>를 펴냈다. 특히 365권으로 간행된 의방유취는 오늘날의 의학총론, 생리학, 병리학, 내과, 외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소아과, 예방의학 등에 해당하는 내용을 95갈래로 나누어 분석해 지금까지도 학술적 가치와 유용성을 인정받고 있다.
아침에 배우면 저녁에 읽을 수 있다는 한글 창제 역시 세종대왕의 대표적 업적이다. 한글은 모음 10개와 자음 14개를 조합해 11,000가지 이상의 음을 낼 수 있다. 일본어는 300가지, 중국어는 400가지 음을 내는 것과 비교하면 한글의 음성적 표현 능력은 단연 세계 최고였다. 인류사에서 유일하게 언어의 창제 과정을 밝히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실린 한글의 원리와 사용법은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인 글자인지를 유감없이 보여 준다.
대규모 국책과제를 만들어내고 적합한 인재를 발굴, 양성해 우수한 결과를 낸 세종대왕이야 말로 스스로가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자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한국과학사 (전상운/사이언스북스)
-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 (박성래/교보문고)
- 인물과학사 – 한국의 과학자들 (박성래/책과 함께)
- 동서양을 넘나드는 보스포루스 과학사 (정인경/다산에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