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스토리 뉴스

스토리 뉴스

대한민국 로봇공학 발전 이끈 로봇연구의 선구자

최적화이론, 지능형 로봇, 퍼지이론 등 제어공학 분야의 선구자
국내 최초 산업용 로봇 개발 및 지능 로봇 연구의 선구적 추진

 

대한민국 로봇공학 발전 이끈 로봇연구의 선구자
故변증남
최적화이론, 지능형 로봇, 퍼지이론 등 제어공학 분야의 선구자
국내 최초 산업용 로봇 개발 및 지능 로봇 연구의 선구적 추진 학력
1962~1969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
1970~1972 미국 아이오와대학 전기공학 석사
1972~1975 미국 아이오와대학 수학 석사
1972~1975 미국 아이오와대학 전기공학 박사

경력
1976~1977 미국 아이오와대학 조교수
1977~2009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 교수
1990~1995 한국퍼지학회 초대회장
2001~2002 대한전자공학회 회장
2004~2006 한국로봇공학회 초대 및 2회 회장
2009~2017 KAIST 명예교수, UNIST 명예교수

포상
2002 월드 오토메이션 콩그레스 공로상
2003 과학기술훈장 혁신장
2003 조셉 엥겔버거 로보틱스상(교육부문)
2012 수당상
2017 대한민국 로봇대상 대통령 표창 한국의 로봇 연구를 위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으며, 그 방향이 올바르게 나아가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던 한 사람. 변증남 KAIST 교수는 로봇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1970년대 열악한 환경에서도 산업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드는 등 다양한 형태의 지능로봇 개발에 선도적 역할을 하며 연구 및 후학 양성에 힘써온 ‘한국 로봇의 아버지’였다. 변증남 교수는 1943년 서울 성동구 상왕십리동(현 중구 황학동)에서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경성전기주식회사에 다니던 부친과 생활력이 강했던 모친 덕분에 대가족이었음에도 순탄한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소설과 시와 노래를 좋아했던 그는 자신의 진로를 법과나 문과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전자과로 지망을 변경한 것은 고등학교 은사의 조언 때문이었다. 장교 신분으로 영어를 가르치던 안병화 선생님은 그에게 “미국은 지금 전자시대이고 앞으로 반도체와 컴퓨터가 유망한 분야이니 대학은 전자과를 지망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은사의 진심 어린 조언에 전자과 입학을 목표로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한 그는 1962년 처음 실시된 대학입시국가고사에서 전자공학과 지원자들 중 최고 성적을 받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점점 어려워졌던 가정환경 탓에 그는 대학 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렇게 대학을 힘들게 졸업하고 1년 후인 1970년, 그는 미국 아이오와대학(University of Iowa)의 연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유학길에 올랐다. 아이오와대학에서 그가 전공한 분야는 제어공학이었다. 제어공학은 공학적 시스템을 자동적으로 운전하는 데 쓰이는 제어 방법을 다루는 분야다. 변 교수는 그중에서도 최적 제어(Optimal Control) 문제의 명쾌함과 범학제적 활용 가능성에 매료됐고, 박사 연구에 몰두했다. 5년간의 공부 끝에 그는 전자공학 박사 학위와 수학 석사 학위를 동시에 취득할 수 있었다. (왜 그런지 박사논문은 찾기가 힘듭니다./해당 정보의 출처가 있다면 표기) “내가 박사 학위를 마쳤을 당시에는 세상만사가 대부분 제어 문제로 보였고, 그런 최적 제어이론을 적용하면 많은 경우 현재보다 나은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공장의 생산 공정에 최적제어이론을 적용하면, 그 공장의 생산성 향상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변증남, 로봇신문 기고 ‘나의 제어공학과 로보틱스’) 1977년 귀국한 그는 KAIST(당시 한국과학원) 전기 및 전자공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거듭 성공으로 산업 및 경제 분야에서의 성장세가 가속화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성장에만 맞춰진 정책의 시행은 산학협력에 기반한 R&D 환경을 위축시켰다. 변 교수는 자동화와 최적 제어기법을 현장에 적용하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녔지만, 노력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실망스런 결과로 이어졌다. 
기회가 생긴 건 1978년 무렵이었다. 한국과학재단(현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산업용 로봇에 관한 제어시스템 개발을 요청받은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로봇 연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반 대학교수의 월급이 10만 원 남짓이던 시절, 2년 간 320만 원의 연구비를 받을 수 있었으니 그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변 교수는 동료 교수들과 함께 KAIS의 전기와 기계를 뜻하는 ‘카이젬(KAISEM)’이라는 5 3-자유도를 갖는 원통 좌표형 몸통과 그립퍼 손을 가진 로봇 매니퓰레이터를 개발했다. CNC 공작기계용 피가공물을 탈부착해 운반이 용이하도록 만든 로봇 매니퓰레이터는 출시 이후 ‘최초의 국산 산업용 로봇’이라며 크게 화제가 됐다. 
변 교수는 카이젬을 효시로 1980년대 후반에는 4각 보행로봇 ‘센토(Centaur)’와 재활로봇 ‘카이저(KAISER)’를 연이어 개발하며 국내 로봇 연구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를 기점 삼아 로봇의 지능화 연구를 국내 최초로 시도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 그는 로봇에 ‘지능’을 더하기 위해 ‘퍼지이론’(불확실함의 양상을 수학적으로 다루는 이론)을 접목하는 방향으로 연구를 추진했다. 
이를 통해 한국퍼지학회의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던 변 교수는 이후 확장 가능한 퍼지추론 프로세서, 모순이 있는 퍼지 규칙 취급 등에 관한 다양한 이론 논문을 국제학술지에 게재하며 학문적 명성을 쌓아 올렸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들을 바탕으로 그는 2003년 국제퍼지시스템학회(IFSA) 학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센토와 카이저의 개발은 그가 장애인을 위한 보조 로봇 공학으로 눈을 돌리게 된 시발점이 됐다. 1990년대 초부터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 로봇 연구, 카메라를 이용한 수화 인식 시스템 연구 등을 진행했으며, 1998/1997?년 이후부터는 척수장애인을 위한 휠체어 부착형 로봇팔 `카레스', 시각장애인을 위한 길안내 로봇 등을 연이어 개발해냈다. 
특히, 1999년 그가 설립한 ‘인간 친화 복지 로봇시스템 연구센터(ERC)’는 ‘보조 로봇 및 인간-로봇 상호작용 시스템’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변 교수는 이곳에서 지능형 주거 공간, 작업장 보조 로봇, 수술 보조 로봇 등을 주제로 연구하며 관련 분야를 선도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02년 한국인 최초로 ‘월드 오토메이션 콩그레스’에서 공로상을 받았으며, 2003년에는 국제로봇심포지엄에서 로봇공학 분야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조셉 엥겔버거 로보틱스상’을 수상하며 국제적 명성을 높였다. 국내에서도 같은 해 과학기술훈장 혁신장을, 2012년에는 수당상을 수상했으며 이외에도 다수의 기관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후진 양성과 교육 활동도 빼놓을 수 없는 공적이다. 1977년부터 그가 양성해낸 제자는 석사 150명, 박사 65명에 이른다. 2000년에는 ‘KAIST 최다 박사 배출 교수’로 뽑힐 정도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여기에는 오상록(KIST), 서일홍(한양대), 송원경(국립재활원), 조영조(ETRI), 유완식(쎄믹스)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정부와 대학, 연구소, 벤처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로봇학계와 산업계 발전에 힘쓰고 있다. “내 호는 크게 배운다는 뜻의 ‘학보(學甫)’인데 시인 두보의 이름자와 같다. 중학교 때 이태백과 두보 이야기를 들었다. 이태백은 술 한 잔 탁하고 나면 뜯어 고칠 데 없이 완전한 시가 나왔지만, 두보는 화장실에 가서도 시를 고칠 만큼 고치고 또 고치며 시를 썼다고 한다. 두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천재가 아니니 두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자들이 앞으로도 꾸준히, 널리 배우길 바란다.” (책 ‘원칙의 울타리’, 변증남)
“국내외 학계에서 거인의 리더십을 수행하셨다. 학술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다른 재능도 합친다면 변 교수가 우리 주위에서는 가장 뛰어난 분이셨다.”(권욱현 서울대 명예교수, 과학기술유공자)

원칙과 열정을 강조하며 로봇 연구자들이 성실하게 목표 기술을 완성할 수 있도록 묵묵히 지원한 그는 자신에게만큼은 냉철한 잣대를 들이대며 끊임없이 배움을 갈망한 리더이기도 했다. 좁은 시야와 고집으로 후학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발붙이는 것을 방해한 건 아닌지 스스로 생각하고 반성했던 참 스승 변증남 교수. 그의 훌륭한 인품과 위대한 학술적 발자취는 우리 주위에서 오래 기억될 것이다.